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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이야기독도의 역사고문서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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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태정류전 제2편(太政類典 第二編)
    [문헌] 태정류전 제2편(太政類典 第二編) 

    태정류전 제2(太政類典 第二編) 187610월 시마네현이 공문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내무성에 질의를 한 것에 대해, 1877년 태정관(太政官, 명치시대의 최고관청, 현재의 내각)에서「伺ノ竹島外一島之儀は本邦係無之儀ト可相心得事」라고 하여,죽도(竹島-울릉도) 1도에 대해 일본과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이라고 최종 결정을 내린 공문서임.(세종대학교 호사카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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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원록9병자년조선주착안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券之覺書)
    [문헌] 원록9병자년조선주착안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券之覺書) 

    원록9병자년조선주착안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券之覺書) 16965월 오키섬(隱岐島)을 거쳐 호키주(白耆州)에 도착한 안용복을 취조하여 막부에 보고한 진술문서로 20055월에 시마네현 오키군의 한 고가(古家)에서 발견. 그동안 일본에서는 안용복의 진술에 과장이 많으며 당시에 조선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 문서의 제일 뒷면 조선의 팔도에는 「此道中竹嶋松嶋有之」라고 하여, 강원도 안에 울릉도와 독도가 있음이라고 당시의 우리 민족들이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일본의 고문서에서 확인된 것임.(강원대학교 손승철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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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문헌]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1885년 일본 해군수로국에서 발행한 수로지이다. 5편 조선동안(朝鮮東岸) 부분에는 독도를 리앙쿠르암으로 표기하고, 울릉도와 함께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두 섬 모두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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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문헌]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1905222일자로북위 37930초 동경13155분 오키섬에서 서북으로 85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을 竹島라고 칭하고 본현 소속 오키도사 관할로 정한다는 시마네현지사 명의의 고시문이다. 이러한 고시는 보통 신문에 게재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 관보나 신문 어디에도 실린 증거가 없어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이는 독도 편입이 비밀리에 진행되어 불법 편입임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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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대한제국 관보 1716호
    [문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대한제국 관보 1716호 

    19001025일자로 발효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는 울릉도를 울도로 바꾸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울릉도를 정식 지방관제에 편입한다는 사실과 함께, 이 칙령 제2조에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및 석도(石島)를 관할할 것라고 하여 울도군수의 관할 구역으로 석도(石島, 돌섬)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대한 제국이 일본보다 4년여 앞서 공식적으로 독도를 우리 영토로 선언한 것이며, 시마네현 고시가 관보에 게재되지 않은 회람용이었던 것과는 달리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발효 2일 뒤 27일 관보에 제재되어 국내외에 공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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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
    [문헌]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 1694, 張漢相, 복사(필사본)

    1693(숙종 19) 안용복 사건이 발발한 후 일본 쓰시마도주(대마도주)가 울릉도를 일본 영토 죽도(竹島)’라고 주장함에 따라, 이듬해 울릉도에 파견되어 현지 조사를 한 삼척 첨사 장한상의 보고서 필사본이다. 장한상은 울릉도 중봉(中峰)에서 육안으로 독도를 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중봉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대관령이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에 섬이 하나 있는데 동남동방향(辰方)에 위치하였으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에 못 미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독도의 존재를 명확히 기술한 것으로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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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개정 일본지리지요략(改正 日本地誌要略) 5
    [문헌] 개정 일본지리지요략(改正 日本地誌要略) 5 

    개정 일본지리지요략(改正 日本地誌要略), 1886

    오키(隱岐) 4을 설명한 후 은기의 서북해상에 송도(松島), 죽도(竹島)가 있는데 두 섬은 거의 1백 리 정도 떨어져 있고, 조선에서는 울릉도라 칭한다. 근래 그 나라의 속도로 정해졌다 한다라고 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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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문헌][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목판본

    조선 성종 때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중종의 증수 명에 따라 이행, 윤은보, 신공제, 홍언필, 이사균 등이 1530(중종 25)에 완성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 관찬 지리서. 이 책에는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는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于山島 鬱陵島 一云武陵 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라고 하여 독도(우산도)와 울릉도가 울진현에 속한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에서 증보된 부분을 표시하였다. 현재 동국여지승람은 전하지 않으나 그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에 대한 위의 내용은 증보된 부분이 아닌 동국여지승람 자체의 내용이어서 15세기에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이어지고 있었음 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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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4의 지증왕조에 하슬라주의 군주인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서기 512).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은 혹 울릉도라고도 한다”라고 하였으나 "여지지(輿地志)"등에서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모두 우산국 땅이다.”라고 하여 우산국에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됨을 적고 있어 이때부터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우리 역사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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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고려사(高麗史) 권58
    [문헌] 고려사(高麗史) 권 58 

    고려사(高麗史) 58 고려시대의 역사·문화 등을 기전체로 정리한 책으로, 58 강원도 울진현조에 이는 혹은 말하기를 우산과 무릉은 본래에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一云于山武陵本二島相距不遠風日淸明則離可見).”라고 하여,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가 별개의 섬이고, 강원도 울진현에 속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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